-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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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도
- —
- 1시간 강수
- —
지금 값을 가져오는 중입니다…
비를 어떻게 재는가
오늘은 비가 옵니다. 그러면 바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비가 얼마나 왔는지 어떻게 잽니까?
기온은 온도계가 있고 바람은 풍속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비는요? 비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무게를 달 수도 없고 자를 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비를 말로만 적었습니다. "큰비가 왔다", "조금 왔다" 하는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게 적으면 견줄 수가 없습니다. 어제의 '큰비'와 오늘의 '큰비'가 같은 비인지, 한양의 '큰비'와 전주의 '큰비'가 같은 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 문제를 조선이 1441년에 풀었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비는 사라지는 것이라 재기 어렵습니다. 말로 적으면 견줄 수 없습니다.
그전에는 땅을 파서 쟀다
측우기 이전에도 조선은 비를 숫자로 적으려 했습니다. 방법은 이랬습니다.
비가 그치면 땅을 파서 빗물이 몇 치나 스몄는지 재어 올렸습니다. 이것을 우택(雨澤)이라고 합니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큰 문제가 있습니다. 왼쪽 그림을 보세요 — 같은 비가 내렸는데도 스민 깊이가 제각각입니다.
- 모래땅이면 깊이 스밉니다
- 마른 흙이면 중간쯤
- 진흙이면 거의 안 스밉니다
같은 비인데 고을마다 다른 숫자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땅이 어제 이미 젖어 있었다면 또 달라집니다.
이제 오른쪽 그림을 보세요. 그릇에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만 기억하세요 땅에 스민 깊이는 흙이 정합니다. 비를 잰 것이 아닙니다.
그릇에 받으면 그릇 크기와 상관없다
오른쪽 그릇 셋은 지름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물 높이는 똑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넓은 그릇은 더 많이 받지만 그만큼 바닥도 넓습니다. 받은 물을 넓은 바닥에 펴니 깊이는 똑같아집니다.
그러니 그릇에 받아 깊이를 재면 그것이 곧 그 자리에 내린 비의 깊이입니다. 흙도, 그릇 크기도 끼어들지 못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규격을 정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아무 그릇이나 쓰면 되는데요.
있습니다. 깊이의 셈은 그릇과 상관없지만, 재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 얕은 그릇은 큰비에 넘칩니다
- 아가리가 좁으면 빗방울이 튀어 나갑니다
- 넓고 얕으면 재기 전에 말라 버립니다
- 무엇보다, 자가 다르면 같은 깊이가 다른 숫자가 됩니다
그래서 조선은 그릇과 자를 함께 정했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깊이는 그릇 크기와 상관없습니다. 그래도 규격이 필요한 까닭이 따로 있습니다.
넓은 그릇과 좁은 그릇을 나란히 놓고 같은 비를 받았습니다. 물 높이는 어떻게 될까요?
1441년, 그리고 1442년
1441년(세종 23년) 여름, 세자였던 훗날의 문종이 구리 그릇에 빗물을 받아 깊이를 재는 법을 생각해 냈다고 《세종실록》이 전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이듬해입니다.
1442년(세종 24년), 조선은 규격을 못 박았습니다.
- 높이 1자 5치 (약 31cm)
- 지름 7치 (약 14cm)
- 재료는 쇠
- 재는 자는 주척으로 통일
그리고 그 규격대로 만들어 전국의 관청에 나눠 주었습니다.
발명은 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규격을 정하고 똑같은 것을 전국에 배포하는 것은 나라만 할 수 있습니다. 측우기가 대단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이 대목입니다.
유럽에서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은 1639년,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빗물을 받아 잰 때입니다. 거의 200년 뒤이고, 그것도 개인의 실험이었지 나라의 관측망은 아니었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1442년에 규격을 정해 전국에 나눠 준 것, 그것이 측우기의 값어치입니다.
1푼은 2밀리미터다
조선이 쓴 자로 재 봅시다.
주척 한 자가 20.7cm 남짓입니다. 그 열 분의 일이 1치(약 2.07cm), 다시 그 열 분의 일이 1푼입니다.
그러니 1푼이 2밀리미터 남짓입니다.
조선의 기록은 푼까지 적었습니다. 2mm 단위로 비를 잰 것입니다. 오늘날 기상청이 0.5mm 단위로 재니 그보다 성기지만, 15세기에 이 정도면 놀라운 일입니다.
손잡이를 움직여 보세요. 같은 깊이가 두 가지 말로 읽힙니다.
그릇 높이가 1자 5치, 곧 310mm입니다. 한반도의 하루 최대 강수량에 맞먹는 깊이라 웬만해서는 안 넘칩니다. 규격을 넉넉히 잡은 것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1자 = 10치 = 100푼. 1푼이 2mm 남짓이고, 조선은 거기까지 적었습니다.
그릇 하나가 아니라 관측망이었다
측우기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은 하늘과 물을 재는 도구를 여러 가지 두고 있었습니다.
- 측우기 — 비의 깊이
- 수표 — 하천의 물 높이. 청계천과 한강에 돌기둥을 세워 눈금을 새겼습니다. 지금도 수표교라는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 풍기대 — 바람. 돌기둥에 깃대를 꽂아 방향과 세기를 보았습니다. 창덕궁과 경복궁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 적었습니다.
《승정원일기》는 1623년부터 1910년까지 거의 매일의 국정을 적은 기록인데, 그 첫머리에 그날의 날씨가 적혀 있습니다. 288년치 날씨 기록입니다.
비가 오면 몇 푼인지, 눈이 오면 어땠는지, 서리가 언제 내렸는지가 날짜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재는 도구가 있고, 규격이 있고, 전국에서 올라오고, 그것이 기록으로 쌓입니다. 이것을 부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 관측망입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도구와 규격과 보고와 기록. 넷이 갖춰지면 그것이 관측망입니다.
그 기록이 지금도 쓰인다
여기서부터가 정말 놀라운 대목입니다.
조선이 남긴 측우기 기록은 박물관 유물이 아닙니다. 지금도 연구에 쓰이는 자료입니다.
서울의 측우기 강수량 기록은 1770년(영조 46년)부터 이어집니다. 영조가 측우기 제도를 되살리며 다시 재기 시작한 때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50년이 넘는 강수 기록이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왜 귀할까요. 기후가 변하는지 보려면 옛날과 견주어야 하는데, 세계 어디서도 이만큼 길고 같은 방식으로 잰 기록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기록으로 18세기 장마가 지금과 어떻게 달랐는지, 가뭄이 얼마나 잦았는지를 셀 수 있습니다.
이백 년 전에 어느 고을 관리가 측우기에 자를 대고 "두 치 세 푼"이라고 적은 그 한 줄이, 지금 기후 연구의 자료가 되어 있습니다.
기록은 그렇게 남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1770년부터 이어진 서울의 강수 기록은 지금도 기후 연구에 쓰입니다.
조선의 측우기 기록이 지금도 학술 자료로 쓰이는 가장 큰 까닭은 무엇입니까?
남아 있는 것과 사라진 것
슬픈 대목도 있습니다.
세종 때 만든 측우기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쟁과 세월을 지나며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남은 가장 오래된 측우기는 금영측우기입니다.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어 공주 감영에 두었던 것으로, 국보입니다. 세종 때보다 400년 뒤에 만든 것인데, 규격이 그대로입니다.
높이 1자 5치, 지름 7치. 400년 동안 규격이 지켜진 것입니다. 그것이 표준이 하는 일입니다.
받침돌인 측우대는 여러 점이 남아 있습니다. 돌이라 오래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남은 것은 기록입니다. 그릇은 녹슬고 깨졌지만 숫자는 종이에 남았습니다.
도구보다 기록이 오래갑니다. 다음 대목이 여러분 차례인 까닭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재어 적을 차례
지금 이 동네 값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화면은 모릅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이 단계는 그대로 됩니다.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는 창밖이 알려주니까요.
측우기를 만들 것도 없습니다. 방금 배웠듯이 그릇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옆이 곧고 위가 트인 그릇이면 됩니다 — 통조림 깡통, 반듯한 유리컵이면 충분합니다.
- 바람이 덜 타는 트인 곳에 둡니다 (처마 밑은 안 됩니다)
- 비가 그치면 자를 대어 깊이를 잽니다
- 밀리미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적어 두세요. 오늘 비가 안 왔다면 0mm라고 적으면 됩니다 — 안 온 날도 자료입니다. 조선의 기록에도 '비가 오지 않았다'가 숱하게 적혀 있습니다.
한 번 적은 숫자는 별것 아닙니다. 열 번, 백 번 쌓이면 그때부터 자료입니다.
1442년에 시작된 일이 그것입니다. 대단한 도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매일 같은 방법으로 재어 적기를 수백 년 이어간 것입니다.
지금 그 줄에 한 칸을 보태실 수 있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세요 한 번은 숫자, 쌓이면 자료입니다. 안 온 날도 적습니다.
오늘 배운 것
- 땅에 스민 깊이는 비를 잰 것이 아니다측우기 이전에는 빗물이 땅에 스민 깊이를 재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흙이 정하는 숫자라, 같은 비가 고을마다 다르게 적혔습니다.
- 그릇에 받으면 그릇 크기와 상관없다넓은 그릇은 많이 받지만 바닥도 넓어 깊이는 같습니다. 그래서 그릇에 받아 깊이를 재면 그것이 곧 그 자리에 내린 비입니다.
- 대단한 것은 그릇이 아니라 규격이다1442년에 높이 1자 5치, 지름 7치, 주척으로 재기를 못 박고 전국에 나눠 주었습니다. 발명은 한 사람이 하지만 표준은 나라만 만듭니다. 유럽보다 200년 가까이 앞섰습니다.
- 도구·규격·보고·기록이 갖춰지면 관측망이다측우기와 수표와 풍기대가 있었고, 전국에서 올라온 값이 《승정원일기》에 288년 동안 날마다 적혔습니다.
- 도구보다 기록이 오래간다세종 때 측우기는 한 점도 안 남았지만 숫자는 남았습니다. 1770년부터 이어진 서울의 강수 기록은 지금도 기후 연구에 쓰입니다.
되돌아보기 — 누르면 그 대목으로 갑니다
주척 한 자를 20.7cm 로 잡은 것은 남아 있는 유물로 잰 어림값이며, 시대와 유물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1441년 세자(훗날 문종)의 착안과 1442년의 규격 반포는 《세종실록》에 실린 내용입니다. 장영실이 측우기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으나 실록에 그렇게 적혀 있지는 않아, 이 레슨에서는 적지 않았습니다. 금영측우기(1837년)는 국보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측우기입니다. 서울의 측우기 강수량 기록은 1770년 이후 분이 남아 있습니다.